🎉 축! 김서른 <아직도 하이틴> 연재 종료!

솔로 생활을 청산하는 그 순간까지만 쓴다는 조건으로 시작한 이 시리즈, 드디어 종료합니다. 좋아하는 것에 푹 빠져 눈을 빛내는 아름다운 사람과 연애를 시작했거든요. 그뿐만이겠어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회사에 일자리도 구했답니다. 다시 독립해서 네모반듯한 오피스텔로 이사했고요, 심혈을 기울인 인테리어로 오늘의집 메인에 걸리기 일보 직전이에요. 부모님과의 관계도 깔끔하게 입장정리했어요. 무한한 사랑과 고유한 독립 사이의 균형점, 그거 별거 아니던걸요. 서른이면 응당 이뤄야 할 모든 걸 마침내 손에 넣었으니, 이제 <아직도 하이틴>은 그만 써도 되겠죠.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좋았겠지만, 거짓말이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저 문단을 쓰는데 제법 기분이 좋아서 ‘달콤한’ 거짓말이라는 관용구가 와닿았다. 취업도 연애도 독립도 모두 손에 닿지 않는 처지를 잠깐 잊고, ‘진짜’인 기분에 빠져들게 됐다. 영화 <디어 에반 핸슨>의 주인공, 에반 핸슨도 처음 거짓말을 시작할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자기 자신에게 편지를 쓴 한 고등학생. 이 편지가 자살한 학교 친구의 유서로 잘못 알려지면서 헤어 나올 수 없는 거짓말이 시작된다.”는 로그라인에 이끌려 보게 된 이 영화. <아직도 하이틴> 시리즈를 쓸 땐 주인공의 처지에 나를 대입하는 편이었지만, 오늘만은 이 에반 핸슨과 거리를 두고 싶다.

우울증과 불안 증세가 있는 에반은 사람들을 대할 때 지나치게 긴장하고, 소심하고, 친구 하나 없는 처지다. 그런 에반에게 상담 선생님은 응원의 말과 하루의 다짐을 담아 ‘셀프 편지 쓰기’를 권한다. 에반은 ‘Dear Evan Hansen’로 시작하는 편지를 쓰며 새 학기의 첫 날을 다독여보지만, 부러진 팔에 감은 붕대에 이름 써줄 친구 하나 없는 상황은 변함없다.

이 학교의 또 다른 외톨이는 코너 머피다. 코너는 분노 조절에 문제가 있는 듯한데, 지나치게 공격적인 태도 때문에 자신을 외롭게 만드는 타입이다. 어느 날 에반은 이미 화가 난 상태의 코너와 우연히 눈을 마주쳤다가 화풀이 상대가 된다. 대낮의 학교 복도에서, 그것도 남몰래 짝사랑하는 조이 머피가 지켜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했으니 에반은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해줄 기분이 아니다. “내일 내가 사라진다 해도 아무도 못 알아차릴 걸?”로 끝나는 편지를 쓴 그날, 하필 또 코너와 마주치는 바람에, 그리고 그 편지에서 조이의 이름을 발견하는 바람에 코너에게 편지를 뺏기고 만다. (조이는 코너의 여동생이다.)

에반은 코너가 자신의 치부를 만천하에 공개할까 봐 전전긍긍하는데, 들려오는 건 전혀 생각지 못한 소식이다. 코너가 자살했다는 것. 유일하게 남긴 것은 (하필!) 주머니 속 에반의 편지. ‘Dear Evan Hansen’으로 시작해 ‘Sincerely, Me’로 끝나는, 수신인은 명확하고 발신인은 모호한 이 편지는 ‘코너가 에반에게 쓴 마지막 유서’로 오해받는다. 자신을 만나기 위해 학교로 찾아온 코너의 부모 앞에서, 에반은 크게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따뜻하고 평온한 미소로 슬픔을 이겨내는 코너의 엄마, 신시아의 얼굴을 보자니 더욱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코너 가족은 에반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에반은 반드시 사실을 이야기하겠다고 다짐하며 그 자리에 나간다. 신시아는 그런 에반에게 코너와 주고받은 이메일이 있다면 나눠주길 부탁한다. 코너가 평생 겉도느라, 따뜻한 기억은 부재해서일까? 신시아는 에반이 코너와 각별한 사이였다고 굳게 믿고, 에반과 코너의 추억을 알고 싶어 한다. 에반은 결국 그녀의 기대를 깨지 못하고, 혼자 나무에 올랐다가 떨어져 팔이 부러진 날의 에피소드를 코너와 사과 농장에서 놀았던 것으로 각색한다. 한번 입을 떼니 거짓말은 어렵지 않다. 아들을 잃고 슬픔에 빠진 부모는 사실 관계를 따질 여유가 없다. 눈앞의 슬픔을 위로하듯, 에반의 거짓말이 시작된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일라나가 코너와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하자, 진짜를 증명하려고 에반은 코너의 ‘유서’를 일라나에게 보낸다. 에반은 절대 남들에게 보여주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코너 프로젝트’ 펀딩 100%를 꼭 달성하고 싶었던 일라나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그 유서를 공개해버린다. 코너와 에반의 우정에 감탄하던 대중은 순식간에 마음을 바꿔, 부유한 코너가 기부를 받는 것에 대한 불편함을 토로하기 시작한다. 불특정 다수가 코너 가족을 비난하기 시작하자 결국 에반은 울면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다. 거짓으로 맺은 관계와 거짓으로 만든 명성은 모두 없던 것처럼 사라지고, 에반은 그 모든 소동을 지난 뒤에 학교를 졸업한다. 

의도치 않게 튀어나온 거짓말이 다시 거짓말을 낳고, 그것이 모두와 실시간으로 연결된 네트워크를 통해 증폭되는 과정은 정말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코너가 살아 있을 땐 아무도 소통하지 않다가 죽고 난 뒤에야 그를 이야기하는 아이러니도 마찬가지다. 이 아이러니가 외로운 에반의 처지와 맞물리면서 상황을 이렇게까지 키웠으니, 에반에게 모든 혐의를 묻기에는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나 자신’의 진짜 모습을 모두에게 고백하고(“MZ”답게 인스타그램 공개 스토리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뒤에야 겨우 평화를 찾은 에반의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에반이 왜 그렇게 거짓말에 몰두한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에반은 눈에 띄게 결핍이 도드라지는 사람이다. 배달원을 상대하기 어려워 음식을 주문하지도 못할 만큼 내성적이고 서툰 성격도 있지만, 부모님이 이혼한 후 혼자 남겨진 것처럼 느꼈던 것 같다. 멀리 떠나간 아버지는 에반이 문자 메시지 10통을 보내면 1번 답할까 말까 한다. 생계를 책임지는 어머니는 간호사로 일하며, 툭하면 당직을 서느라 에반을 혼자 남겨 둔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에반은 팔이 부러지던 날 나무에서 떨어진 건 실수가 아니라 ‘자살시도’였다는 것을 뒤늦게 고백한다. 얼마나 외롭고 정처 없었으면 생을 놓기로 결심했을까. 그러고 나서도 자신을 구하러 올 사람이 아무도 없어 한참을 누워 있었던 아이는 도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떠올리면 너무나 쓸쓸하다.

“모든 건 슬픈 거짓이었을 뿐 / 진짜가 아닌 걸 나도 알아 / 하지만 우린 행복했지 / 그 행복을 놓치기 싫었나 봐 /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었나 봐 / 난 믿고 싶었던 거야, 믿기만 하면 현실과 마주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 아니, 여전히 난 엉망이 된 내 모습을 부인하고 싶어 / 이 초라한 루저가 나라는 걸 믿기 싫어 / 아무에게도 이 모습을 보이기 싫어 / 누구도 내 진짜 모습을 봐선 안 돼”

현실을 마주하는 대신 가상의 행복으로 도망쳤던 에반. 영화 <디어 에반 핸슨>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마냥 낙천적이지는 않지만 사려 깊고 단호하다. 에반에게는 적어도 “언젠가 이 모든 게 아주 먼 옛일이 될 거야”라고 위로해주는 엄마라는 존재가 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서 아버지의 빈자리까지 채워주지는 못하지만, “너무나 크게 느껴지는 일이 아주 작게 느껴지는 날까지” 에반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하는 엄마가 있다. 최악의 최악을 거듭한 뒤에도 여전히 자신을 지지하는 존재가 있다는 걸 확인한 에반은 현실의 자신을 대면할 용기를 내어 자신의 잘못을 수습하기 시작한다. 사랑의 힘으로 에반은 겨우 그 자신이 된다.

성장의 조건은 단 하나, 나 자신이 되는 것. 이 영화에서 거는 조건은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다. 영원히 들키지 않을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한다고 해도 에반의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고, 단박에 코너 가족만큼 부자가 될 일도, 어머니가 일을 줄이는 상황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기 스타가 된다고 해도, 꿈에 그리던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시작한다고 해도 조건은 변하지 않는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지 못한다면, 끝없이 거짓말을 거듭하며 자신과 주변을 속여야만 하는 지옥으로 걸어 들어갈 거라고 영화는 에반을 통해 말해주는 것 같다. 

<아직도 하이틴>을 처음 시작하면서 걸었던 그 ‘성장’의 ‘조건’을 다시 한번 생각한다. 서른한 살이 되면, 연애를 하면, 취업을 하고 독립을 하면, 어쩌면 결혼을 하면, 어쩌면 아이를 낳으면, 그러면 나는 “한 뼘 더” 성장하는 걸까? 그러면 ‘어른이 됐다’고 느낄까? 지금의 나보다 더 나은 버전의 내가 될까? 그런 의문을 스스로에게 되돌려해 본다. 서른한 살과 연애와 취업과 독립은 누구의 바람인가, 그게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일까? 현실과 마주하기 싫어서 막연한 미래 어딘가에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걸어뒀는데, 걸어도 걸어도 그 신기루에 닿을 수 없다면. 이 모든 건 지금의 불안한 나를 달래기 위한 거짓말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요원하다. 나와 같은 마음인 주민님이 있다면, 안희연 시인의 「스페어」를 함께 읽고 싶다.

우리는, 에반이 그랬고 내가 그런 것처럼, 감자에 난 싹을 도려내면 그 자리에 새살이 돋길 바라지만 감자는 도려낸 모양 그대로 남을 뿐이다. 지나온 과거에 생채기를 입은 건 사실이지만, 그 생채기를 모두 도려내고 새로운 나로 태어날 수는 없는 일. 지금의 나를, 상처 입고 주눅 들고 기운 빠진 나를 달래어 오늘을 버티는 일만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디어 에반 핸슨>과 싹이 난 감자가 내게 가르쳐 준 것.

거짓말 아님! 서른이 되거나 연애를 시작할 때까지만 연재한다고 조건을 걸었는데,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지만 연재를 종료하려 합니다.（⌒▽⌒ゞ 감자가 도려 낸 모양 그대로 살아가라고 했으니 괜찮겠죠⋯. 

한 사람이 태어나 자라서 ‘어른’이 된다는 건 무엇일까 궁금해서 시작한 연재인데요, 결국 이 모든 이야기가 어른 어쩌고 그런 거 없고, 그냥 오늘을 충실히 살라(!?)는 결론으로 수렴되는 것이 재밌었습니다. 연애도 독립도 못한 초라한 서른 살이지만, 그래도 이 글을 쓰면서 나 자신과 좀 더 친해진 것 같아 좋네요.  

저는 겨울방학을 갖고 잠깐 쉬어갈까 해요. <아직도 하이틴> 시즌 2로 돌아올지, 아니면 새로운 주제를 이야기할지는 쉬는 동안 고민해보려 합니다. <아직도 하이틴>을 읽어주신 모든 주민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립니다. 앞으로도 김서른만이 할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찾아, 부지런히 써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