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른아, 네 이상형은 뭐니?” 

이상하게 이상형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뭔가를 빠뜨린 사람처럼 허둥지둥하게 된다. OX 퀴즈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 얘기도 아니고, 그냥 내 이상형이 뭐냐는 가벼운 질문인데도 그렇다. 연애 경험도 없고, 간절하게 연애를 바란 적도 없어서 그런 걸까? 10번 물어도, 10번 다 처음 받아보는 질문 같다. 아이 그게 뭐가 중요해~하며 벌러덩 눕고 싶은데, 좋고 싫은 게 어느 정도 있어야 맞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친구의 말에 다시 몸을 일으키게 된다. 

‘R=VD’라니까 구체적으로 꿈꿔보자. 김서른답게 하이틴 영화에서 이상형을 골라보자면(하이틴과 연애하고 싶다는 얘기 아닙니다🚨), 영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1999)>의 히스 레저를 가장 먼저 꼽겠다. 남들이 다 보는 자리에서 프러포즈는 최악이지만, 히스 레저가 연기하는 ‘패트릭’만큼은 용서할 수 있다. 전교생 앞에서 <Can’t take my eyes off you>라는 명곡을 중저음의 목소리로 부르며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키 크고 몸 좋은 프리티 보이⋯. 배우의 아름다운 외형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몸을 날려 웃음을 만드는 위트도, 살짝 설렜어 나.

20년도 더 된 영화는 하이틴 로맨스의 클래식한 문법으로 가득하다. 캐릭터 설정이나, 인물의 갈등과 화해 역시 어떤 전형성을 크게 피해 가지 않는다. 오히려 그 전형성을 맘껏 즐기는 것이 2022년의 감상법이려나. 그렇지만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서로의 진짜 모습을 발견하고, 마침내 사랑에 빠지기로 선택하는 일련의 과정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지 않을까? 오래된 대중영화 앞에 붙는 ‘뻔한’이라는 뻔한 수식어를 잠깐 접어 두고, 영화 속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따라가며 김서른이 꿈꾸는 사랑도 뻔하게 그려보겠다.

아웃사이더인 패트릭과 성격 더러운(“ill-tempered”라는 수식어로 묘사된다) 캣의 만남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전학생 ‘카메론’이 캣의 여동생, ‘비앙카’에게 반한 순간으로 거슬러 가야 한다. 한 학년 아래인 비앙카는 언니와는 달리 상냥한 성격과 눈에 띄게 예쁜 외모로 전교생의 구애를 받는다. 비앙카는 인기를 맘껏 누리며 데이트하고 싶지만, 남자의 ‘ㄴ'만 나와도 거품을 무는 아버지가 번번이 가로막는다. 그러다 ‘언니가 데이트하면 허락하겠다’는 아버지의 말이 카메론의 귀에 들어가면서, 카메론은 캣에게 데이트 상대를 만들어주려는 계획을 짠다. 아무도 캣과 엮이고 싶지 않아 하니 돈을 주고 누군가를 고용해야 하는 상황. 그렇게 돈 많고 잘생기고 비앙카에게 관심 있는 ‘조이’가 이 계획의 투자자, 캣의 성질머리를 견딜 만큼 배짱 있어 보이는 패트릭이 고용인이 된다.

아니 근데 남자애들이 캣을 대하는 태도에는 상당히 불만을 표하고 싶다. 캣이 하는 말을 잘 들어보면 틀린 얘기 하나 없다. 자동차 앞에서 미적거리는 오토바이를 보고 ‘꺼지라’ 소리치고, 수업 시간에 고전 문학 커리큘럼의 백인 남성 중심적이고 여성 혐오적 측면을 지적하고, 파티에서 자신의 엉덩이를 움켜쥐는 남자애의 고간을 걷어 차는 것이 뭐 그리 “성질 더러운 개망나니” 같은 일이라고(?). 하지만 10대 남자애들(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남들이 말하지 않는 문제를 걸고 넘어지는 똑똑한 여자애를 못 견뎌하니, 학교에서 캣의 평판은 엉망진창이다. (그저 “오늘 생리하냐”는 말로 조롱하기 바쁘다!)

2022년을 살아가는 김서른 이모의 눈에 캣은, 내게 이런 친구가 있다면 반드시 동경했을 유형의 사람이다. 실비아 플라스의 <벨 자>를 읽고, 락 밴드 덕질을 하고, 히피펌에 크롭 티셔츠를 걸친 소녀라니. 21세기 한국에 태어났다면 망원동 어드메의 힙스터일 것이 분명한 세련이다. 하지만 세기말 미국 고등학생의 이목은 끌지 못하는 건지, 비앙카는 언니의 취향을 탐탁지 않아하며 “겉모습을 바꿀 생각은 없어? 조금만 가꾸면 언니도 예쁜 얼굴이야.”라 평가한다. 남들과는 좀 다르고 세련되기를 애쓰는 여자애들은 제대로 평가받기 어려운 모양이다.

패트릭이라고 해서 캣의 취향을 이해하는 건 아니다. 캣이 좋아하는 걸 알아왔다며 카메론이 목록을 읊어주자 한 마디로 일갈해버리는 패트릭. 

카메론: 캣이 좋아하는 것은 태국 음식, 여성 작가, 여성 인디 락 밴드⋯ 

패트릭: 우동이나 먹고 찢어지는 음악이나 들으란 거냐? 

그러면서 캣이 밴드 공연을 보러 가는 날에 맞춰 클럽으로 향하는 패트릭의 뒷모습이 웃기다. (레즈비언 클럽인지 뭔지 극극여초 클럽이라, 패트릭에게 별 관심 없어 보이는 것도 나의 웃음 포인트) 신나게 춤추는 캣의 모습을 관찰하고, 캣이 좋아하는 음악을 들어주는 패트릭. 그러면서 캣에게 “네 취향 제법 괜찮네~”라고 말을 건넬 때, 나는 패트릭과 캣이 말이 잘 통할 거라 느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하나. 패트릭이 실비아 플라스를 읽는 페미니스트에다가, 인디 락 밴드의 음악을 듣는 남자애였다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더 끌렸을까?

아마 아닐 거라는 게 정말이지 흥미롭다. 이상형을 묻는 질문에 흔히들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을 최우선으로 꼽는다. 나도 지금보다 좀 더 어릴 땐,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대한 취향이 비슷해야 대화가 잘 통할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입는 옷, 그 사람이 읽는 책과 보는 영화로 그 사람을 시시콜콜하게 따지고 평가하려 한 것 같다. 그럼 취향이 일치할수록 대화가 잘 통했을까? 같은 ‘정세랑’을 읽어도 여전히 우리 사이에는 깊고 넓은 심연이 존재하던 걸⋯. 몇 번의 매혹과 착각을 경험하고 나서야, 취향은 대화의 좋은 소재일 뿐 그 취향을 징검다리 삼아 서로에게 건너가려는 태도가 바로 ‘대화가 잘 통한다’는 뜻이라고 정의했다.

파티장을 빠져나와 그네에 나란히 앉아서, 또 집으로 돌아오는 길 패트릭의 차에서 대화하며 두 사람은 서로의 내면을 조금씩 알게 된다. ‘남들의 시선 중요치 않아~’라며 언제나 달라달라를 외칠 것만 같았던 캣이 실은 아버지의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캣에게 비앙카보다 더 예쁘다고 말해주는 패트릭이 다정하고 따뜻한 심성을 지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날 밤 패트릭에게 끌린 캣은 먼저 키스하려 다가간다! (물론 이 시도는 실패하는데, 이유는 영화를 직접 보시길⋯)

캣: 이걸 하고 싶어.

패트릭: 뭘?

캣: 이거! 

패트릭: 밴드? 

캣: 그럼 카 스테레오겠냐? 당연히 밴드지. 아버진 펄쩍 뛰시겠지만. 

패트릭: 아버지 말씀을 그렇게 잘 듣는지 몰랐는걸. 

캣: 이젠 알겠냐?

패트릭: 알 것도 같아. 

캣: 사람들은 내가 못됐다고 해.

패트릭: 그 분야라면 나도 만만치 않지. 

남들이 뭐라든 상관없다며 쿨하게 굴던 캣. 그런 사람이 아버지에게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이, 정말 K-장녀의 심연을 건드리는 동시에 이 캐릭터를 훨씬 더 입체적으로 만든다. 동생 비앙카에게 “남들이 원하는 대로 살지 말라” 충고하는 까칠한 언니는 정말로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로울까? 실은 타인에게서 자유롭지 못한 자신의 처지를 예민하게 감각하기에, 캣은 스스로 다짐하듯 ‘자유로움’을 이야기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아버지의 품에서 벗어나길, 언젠가는 더 이상 사람들의 구설에 오르지 않길 바라며. 이 날 이후로 캣과 패트릭은 아무도 모르는 서로의 속내를 털어놓으며 가까워진다.

잠깐, 내 속에 아버지가 너무 많아서

잠시 캣의 이야기를 하고 넘어가겠다. 영화 후반부, 캣은 같은 학년이었던 조이와 몇 년 전에 데이트한 사이였다고 비앙카에게 털어놓는다. 남들이 다 첫 경험을 하는 시기라 딱 한 번 같이 잠도 잤다. 하지만 캣은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아 더 이상 자기 싫다고 하니, 조이가 그를 차 버렸다는 얘기도 함께 해준다. 아버지가 졸업 파티에 가지 못하게 해서 심통이 난 비앙카를 나름 위로하려는 의도였지만, 비앙카는 조이와의 관계를 진작 이야기해주지 않은 언니에게 화가 난다. 

비앙카: 언니는 왜 나한테 말 안했어? 

캣: 네 스스로 판단하길 바랬어. 

비앙카: 그런데 왜 아빠가 날 감금하는 걸 방치해? 난 언니처럼 바보가 아니야. 

캣: 널 보호하고 싶었어. 

비앙카: 그래서 난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하라고? 

캣: 경험이라고 다 좋은 건 아니야. 남자는 믿을 수 없어. 

비앙카: 그래서 난 시키는 대로 해라? 

캣은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비앙카의 선택권을 뺏고, 꼭 아버지처럼 누군가를 통제하려고 했단 걸 알게 된다. 한 사람의 내면에 수많은 모순이 부대끼고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내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건 경외일 때도 있고, 공포일 때도 있다. 그 사실을 받아들일 때, 캣 안의 아버지는 죽고 온전한 그 자신이 될 것이다. 태어난 둥지를 벗어나 자신만의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그러니까 캣이 아버지가 반대하던 동부의 대학으로 결국에는 떠날 때 나는 함께 안도했다. 사실 이 영화에서는 아버지가 갑자기 개과천선해서 캣을 놓아주는 바람에 김이 좀 새기도 하지만, 어쨌든 여러모로 해피 엔딩이다.

다시 캣과 패트릭으로 돌아가자.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도 곁을 맴돌다가, 카메론의 계획을 따라 돈을 받고 접근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드러낸 뒤에야 진짜 연인이 된다. 캣은 패트릭이 실은 자신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의 돈을 받고 접근했다는 사실에 상처받지만 그를 온전히 미워할 수 없다. (이 영화의 제목, ‘10 Things I hate about you’는 그런 캣의 진심을 담은 시의 제목이다.) 패트릭은 조이에게 받은 돈으로 캣이 밴드를 시작할 수 있게 기타를 사주는 것으로 화답한다. 하이틴 로맨스의 정석다운 귀여운 결말이다.

캣과 패트릭은 알아서 잘 살겠고, 이제 내 차례다. 솔직히 이 글을 시작하면서는 패트릭에 관해 쓰려 했는데, 어느새 패트릭에 이입해 캣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글을 완성한 것 같다🤤 얘들아, 아줌마 사랑 잘하지?⋯⋯ 캣과 패트릭이 지닌 고유의 매력, 그리고 둘이 만나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아름다워서 난 두 사람 다 사랑해버려야겠다. 아무튼 내 이상형은, 

1. 겹치는 취향이 있다면 즐겁겠지만 아니어도 좋고,
   : 오히려 자신의 취향에 푹 빠져 눈을 빛내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낌
2. 내가 가진 결핍과 욕망의 모양을 이해할 줄 아는 사람
   : 작게는 웃음 포인트에서 크게는 삶의 가치관과 인간관계의 모습을 결정할 만큼 중요하기 때문. 비슷한 모양을 가진 사람이라면 공통점을 찾기 쉬울 것 같다

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정리하고 보니, 이건 또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서 구체적인 부분을 찾아볼 수가 없네⋯. 그놈의 이상형 참 어렵다. 

패트릭처럼 남들 앞에서 끝내주는 세레나데를 부르거나, 캣처럼 패트릭을 구하기 위해 체육 선생님 앞에서 홀라당 가슴은 못 까겠지만, 어쨌든 누군가를 위해 무언가를 기꺼이 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내가 좋아하는 책과 영화에 대해 혼자 떠들 때도, 듣는 사람이 지루하지 않도록 화려한 언변과 적절한 센스, 괜찮은 안목을 키우겠다. 그런 건 영 따분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 홀랑 빠질 수도 있으니 적당히 활동적인 취미도 만들어 둬야지. 

고전적인 로맨스 코미디 영화를 보고 나니, 아주 고전적으로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도 내가 꿈꾸는 사랑을 아주 완벽하게 표현한 소설의 구절로 오늘의 글을 마무리한다. 주민님, 우리 가을엔 사랑을 합시다❤️

“서로의 흉터에 입을 맞추고 사는 삶은 삶의 다른 나쁜 조건들을 잊게 해 주었다. (...) 그리하여 인표는 자발적으로 꽃무늬 지옥에 걸어 들어갔다.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다가 어느 날 눈 떠 보니 꽃무늬 커튼이 달린 집에서 꽃무늬 이불을 덮고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 정세랑, 『보건교사 안은영』, p.360”

P.S 

언젠가 비앙카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것도 참 재밌을 것 같다. 이 영화를 통틀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비앙카다. 누군가와 데이트하겠다는 단순하고 올곧은 욕망이 이 모든 판을 깔았으니 말이다. 조신한 퀸카가 결국엔 주먹을 날려서 전남친을 응징하는 것도 아주 맘에 드는 결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