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별나도 괜찮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시리즈 시청 후 일독을 권합니다.

“는 김서른을 좋아한다… 사실입니까?” 우영우 변호사의 솔직한 ‘참참참’에 송무팀 이준호 씨는 동공에 지진 나던데, 우리 님은 어떨지😚 아차,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아직 보지 않은 주민님도 있을 텐데… 하지만 우영우 이야기를 안 하기가 쉽지 않아.

몇 번인지도 몰랐던 ENA 채널을 찾아 <우영우>를 본방 사수하고, 집에 있을 땐 ASMR로 틀어둘 만큼 우영우 과몰입 중이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천재 변호사 우영우가 보고 듣는 방식은 나의 것과는 조금은 달라서, 우변을 통해 새삼스레 느끼는 것도, 배우는 것도 많은 요즘이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주인공이 등장한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마침 넷플릭스에서 찾아볼 수 있어 그런지, 함께 거론되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옽뜨스텔라> 10호 안내서도 소개한 적 있는 <별나도 괜찮아>. 작년 7월, 마지막 시즌 공개를 앞두고 <옽뜨스텔라>에서 다뤘는데 벌써 일 년이 지났다니! 일주년 맞이 사랑을 고백할 타이밍이다. 이 시리즈는 정말, 내 인생 최애 드라마라고 자신 있게 꼽을 수도 있다. 10대 남매인 샘과 케이시, 엄마 엘사와 아빠 더그, 그리고 그 친구들이 처음과는 모두 다른 모습으로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는 게 나는 좋다. 이 드라마만큼 ‘성장’을 잘 이해하고, 모든 캐릭터에게 납득할 만한 성장의 기회를 부여한 이야기도 없는 것 같다.

모든 등장인물이 저마다 매력적이긴 하지만, 내가 이 시리즈에서 가장 감정 이입한 사람은 주인공 샘의 여동생 케이시다. 케이시는 육상 특기생으로 특목고에 편입할 만큼 유망주로 꼽히는데, 오빠 샘을 누구보다 잘 챙기면서도 뒤통수를 갈길 줄 아는 쿨한 면이 있고, 재밌고 다정한 성격의 소유자다. 누구에게나 쉽게 호감을 살 수 있을 만한 외모와 성격이지만, 이런 케이시에게도 어둠과 고민은 있는 법. 오늘 <아직도 하이틴>에서는 케이시를 중심으로, 자신이 누구인지 이해하고 사랑을 선언하며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곱씹어보겠다.

케이시는 이성애자 남성인 ‘에번’과 연애를 시작하며 처음 사랑을 경험한다. 그러다 전학 간 클레이턴 특목고의 육상부에서 ‘이지’를 만나며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한다. 에번은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피자 가게에서 일하며 고만고만한 하루를 사는 녀석이지만, 착하고 안정적인 남자 친구다. 반면 이지는 전학 첫날부터 텃세를 부리며 케이시를 경계하고, 잘난 사립 특목고 친구들 사이에서 결핍을 들키지 않으려 경계심과 자존심을 갑옷처럼 두른 여자애다. 처음엔 원수처럼 시작했지만, 서서히 가까운 친구가 되면서 케이시는 이지와의 관계에서 튀는 스파크를 도저히 외면하지 못한다.

결국 케이시는 이지에게 끌리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에번에게 이별을 고한다. 서로의 감정을 알면서도 회피하고, 에번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마침내 이지와 연애를 시작한 것이 시즌 3. 심각하게 이혼을 논의하던 부모도 재결합하고, 아웅다웅하던 오빠도 독립했으니, 시즌 4에서는 케이시가 이지와 그저 행복한 연애를 하려나 생각했다. 하지만 시즌 4에서, 케이시는 삶의 정말 중요한 고민과 마주하게 된다. 바로 나 자신이 누군지에 관한 것, 즉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

가족에게 커밍아웃한 후(편견 없는 가드너 가족⋯ 부럽습니다), 케이시는 학교의 성 소수자 모임(GSA)에 이지와 함께 나간다. 모임의 여자애가 첫 여자 친구를 사귄 후 “모든 게 훨씬 더 나답게 느껴졌다”는 고백에 케이시와 이지의 표정이 달라지는 게 재밌다. 그 말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정말 그렇다”라고 외치며 환하게 웃는 이지와 달리, 케이시는 그 모임에서 겉돌기만 한다. 성별과 성 정체성을 예민하게 구분하고 정치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친구들과, 그 모임에 빠져드는 이지를 보며 케이시는 거리감을 느낀다.

더군다나 UCLA 대학을 준비하려 육상 훈련에 매진하게 되면서 케이시의 일상은 좀 더 빡빡해진다. 학교 공부도 잘해야 하고 달리기 기록도 유지해야 하는데, 틈틈이 이지와 자전거도 타야 하고, 눈 맞으면 뽀뽀도 해야 한다. 그러나 성적은 자꾸만 떨어지고 편입 장학금까지 잃을 위기에 처하자, 상황은 더욱 나빠진다. 자신의 미래와 사랑하는 이지 모두의 손을 놓을 수 없어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으며 스트레스를 삼켰던 케이시는, 입학 담당자가 지켜보는 중요한 육상 경기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경기장을 도망쳐 나온다.

케이시: 에번과 헤어지는 건 힘들었어.

이지는 사랑하고, 아주 많이.

근데 그걸로는 부족한 거 같아. 같이 있으면 그런 기분이 들어.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확신을 가져야 할 것 같은 기분. 근데 어떻게 하면 더 목소리를 내고 과감해지고 정치적이게 되는지 모르겠어. 난 아직도 그런 얘기를 할 줄도 모르는데. 나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건 문제가 있는 걸까?

- 케이시: 나 양성애자 같아. 

- 샘: 당연하지, 남자 친구 사귀었다가 여자 친구를 사귀었잖아.

- 케이시: 그리 간단하게 정의할 순 없지만 그래도 괜찮아. 내가 직접 말한 건 처음이야. 

- 자히드: 기분이 어때?

- 케이시: 안도감이 들어.

사랑 안에서 깊은 안도감을 느끼는 사람의 얼굴은 언제나 아름답다. 나는 실의에 빠져 있던 케이시가 샘에게 운전을 가르쳐 주려 침대 밖을 빠져나오고, 일련의 사건을 겪으며 다시 달리기 시작하고, 마침내 양성애자인 자신을 받아들일 때까지 이어지는 이 에피소드들을 사랑한다. 가족과 친구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으며, 용기를 내어 마침내 제 자리를 찾아가는 이 흐름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것이라 부럽기도 하다. “I feel relieved.” 나도 언젠가 이런 고백을 하게 될까? 경직돼 있던 얼굴 근육이 한순간 풀어지고, 내면을 솔직하게 들여다본 사람만의 단단한 눈빛을 내게 될까?

지난주 토요일은 3년 만에 서울 퀴어문화축제가 열린 날. 나도 무지개 깃발을 들고, 친구들과 함께 시청 광장으로 향했다. 넘치는 주의 자비가 장대비처럼 내려 옷이고 신발이고 다 쫄딱 젖었지만, 오랜만에 느끼는 해방감과 자유로움이 모든 축축함을 상쇄할 만큼 즐거웠다. ‘Queer I am!’ 그 언젠가의 퀴어문화축제 슬로건처럼, 나는 그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퀴어로 해석될 수 있었고 그게 마음 편했다. 이성애자처럼 보이지 않을까 봐 조바심 내던 어린 날의 나보다는 그래도 많이 달라진 것 같다.

내내 행복했지만 단 한 번 찜찜한 순간이 있었다. 함께 어울려 논 친구들은 동성애자로 커밍아웃한 친구도 있고, 이성애자로 커밍아웃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성애자인 친구도 있다. 어쨌든 서로의 성 정체성이 뭐든 다 괜찮은 모임이긴 했는데, 웃고 떠들다가 ‘너네 헤테로 애들은~’이라는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다. 나는 그 순간 그 ‘헤테로 애들’에 내가 포함돼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거기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지도, 아니라고 부정하지도 못하고 애매하게 웃고 말았다. 며칠이 지났는데 그 말이 자꾸 마음에 남는다. 나는 무엇이 두려워 자꾸 주저하고 있나?

아직도 내게 성 정체성은 모호한 영역이다. 누군가를 사랑해야 어떤 ‘-애자’됨을 수행할 텐데, 수행하지 않고는 ‘-애자’됨을 알아차리기 어렵다는 것이 삶의 아이러니다. 이성애자든, 동성애자든, 양성애자든 아니면 그 무엇이든, 타인에게 나를 보여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받기 위해서는 어쨌든 선언이 필요하다. 당장 데이팅 어플만 깔아 봐도 나의 지정 성별, 성 정체성, 성 역할, 심지어 머리 길이까지(!) 이 모든 게 나를 설명하는 어떤 정체성이 되는데, 나는 아직도 그걸 하나하나 결정하는 게 어렵다.

샘: 남극에선 견고한 베이스캠프는 필수지만 최고의 베이스캠프도 일시적인 집일 뿐이에요. 배워야 할 걸 다 익히고, 찾으러 갔던 걸 다 찾고, 극복해야 할 것으로부터 살아남으면⋯ 다음으로 넘어가야죠.

김서른의 <아직도 하이틴>은 김서른이 서른 살이 되거나, 연애를 시작하는 순간을 연재 종료로 두고 시작한 프로젝트다. 어쨌든 서른 살이 반년이 지났고, 나는 연애를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엄마랑 투닥거리기 바빴고, 그저 마감 날짜만 꾸물대며 맞췄다. 마감 때마다 똑같은 얘기만 도돌이표처럼 하는 건 아닐까 걱정한다. 내 인생 나도 노잼인데 보는 사람은 얼마나 노잼일까 싶어 그만두고 싶은 마음도 든다.

그래도 이 글을 하나하나 쓰는 것이, 내가 나를 알아차리는 과정이라 생각하면 조급한 마음이 누그러진다. 김서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나의 혼란과 걱정과 조바심을 이해하고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니 나 꽤 운이 좋잖아? 뉴스레터 답장을 보내주는 분도 있고 슬그머니 다가와 ‘너 김서른이지’ 하고 아는 척하는 친구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계속해봐도 좋겠구나 싶은 안도의 한숨을 남몰래 푸, 쉰다.

샘은 그토록 바라던 남극 여행길에 오르고, 케이시와 이지는 함께 UCLA에 가기로 이마를 맞대며 약속하며 <별나도 괜찮아>의 이 모든 아름다운 이야기는 마침표를 찍는다. 1년이 지났으니 케이시는 이지와 육상 트랙에서 사이좋게 달리고 있을 거고, 샘은 무사히 여행에서 돌아왔겠지? (과몰입 중입니다) 혹여나 육상을 그만두더라도, 여행이 뜻처럼 풀리지 않더라도, 삶은 계속될 거라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김서른은 이제 어떤 다음으로 넘어가 볼까?

우리 아이들 UCLA 가서 CC 된 거 한 번만 보여주라 아줌마 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