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레이디 버드>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시청 후 일독을 권합니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야심 차게 독립을 선언하고 부동산 예약까지 했는데, 어찌어찌하여 변함없이 부모님과 살고 있다. 나는 독립 10년 만에 고향인 지방 도시로 돌아온 캥거루족. 대도시의 1인 가구로 살며 혼자 하고 싶은 짓(그러니까 자정에도 경의선 공원에 뛰쳐나가 산책하는 힙스터 코스프레 같은.. )은 다했는데, 요즘은 저녁 7시면 칼같이 식탁 앞에 앉아 밥 먹고 과일 깎아 먹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취업은 손에 닿질 않고, 모아둔 돈은 떨어지고, 서울에 몰려 있는 친구들은 저마다 바쁘다. 인스타그램만 들여다봐도 절로 조바심 나서 엉덩이가 들썩거리거나, 무기력한 마음에 유튜브만 쳐다보거나, 아니면 두 개를 동시에 하거나인데, 그럴 땐 꼭 엄마가 속을 긁기 마련이다.

엄마: 오늘 서류 몇 개 냈는데?

김서른: (..) 말하기 싫어.

엄마: 그러다 평생 취업 못한다. 하긴 그렇게 잘 거 다 자면서 뭘 제대로 하겠냐 싶다. 

김서른: (...) 내가 알아서 할게.

네이버 부동산을 켤 타이밍이다. 지금 내 예산으로 구할 수 있는 집들을 한참 구경하다 보면 (겨우 5평 원룸인데 왜들 그리 늘어나 있어?) 한숨을 푹 내쉬고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 자신이 나고 자란 새크라멘토를 지루하게 여기며, 뉴욕에 가고 싶어 야단법석을 떨던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피어슨의 마음이 이랬을까? 크리스틴보다 열 살은 더 먹어도, 대학을 졸업하고 운전면허가 있어도, 독립은 어렵다.

영화 <레이디 버드>는 고등학생 ‘레이디 버드’가 졸업하고 대학에 가기 전까지 일상을 담은 영화다. ‘레이디 버드’는 본명인 크리스틴 맥피어슨 대신 스스로 붙여준 이름. 그는 부모가 지어준 이름도 지겹고, ‘철로 변의 구린 쪽(wrong side of the tracks)’에 있는 집도 맘에 들지 않는다. 새크라멘토를 떠나 동부로 진학해 예술 대학에 다니는 게 꿈이지만, 사실 학업에도 연극에도 별다른 재능은 없어 보인다.

이 이야기의 설계자는 이런 그가 ‘알고 보면 좋은 녀석’이라며 드라마틱한 사건을 만들어주는 대신, 그 나이 때 겪을 법한 온갖 구질구질한 일은 다 붙여 준다. 새로 사귄 친구에게 잘 보이려고 부잣집에 사는 척했다가 들킨다든지, 연애하는 족족 시답잖게 망한다든지, 다정한 아빠에게 말로 상처를 내고 엄마와는 사사건건 싸운다든지. 

그래도 ‘미운 열일곱’ 레이디 버드는 대단히 멋진 구석은 없어도 무사히 어른이 된다. 자기 자신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주변으로 시야를 확장하고, 타인의 존재에 비추어 자신을 바라볼 줄 알게 된다. 그의 주변은 다행히 실수를 너그럽게 용서하고, 더 나은 선택을 응원하고, 때로는 좌절을 배우도록 시련을 주는(?) 좋은 사람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크리스틴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는 엄마 마리온이다. 나는 이 영화를 그냥 ‘엄마와 딸의 성장담’으로 바꿔 부르고 싶을 만큼 영화가 엄마와 딸의 관계를 그려내는 방식이 좋았다. 자애로운 어머니와 토끼 같은 딸이 사는 유토피아 대신, 모진 말로 싸우다가도 언제고 원피스가 예쁘다며 입을 모아 감탄하는 현실 모녀의 세계라서. 

레이디 버드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많다. 어딜 가나 눈에 띌 정도는 아니지만,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하는 그 아이의 모습은 좀 이상하게 비치기도 한다. 그런 레이디 버드의 엄마 마리온은 누구보다 현실적이고, 책임감 강한 사람이다. 직장 생활이 위태로운 남편 대신 가장 노릇을 하고, 철없는 딸에게는 엄한 양육자가 된다. 정학당하고 돌아온 레이디 버드를 혼내며, 먹고사는 것의 어려움을 디테일하게 읊으며 딸이 얼마나 철딱서니 없는지 지적하는 그의 모습을 보라. 거기에 ‘나를 키우는 데 얼마나 드는지 정확히 말하라며(“Give me a number!”)’ 대드는 레이디 버드 역시 만만찮다. 파이터 기질은 똑 닮은 모녀다.

‘너는 너 먹여 살릴 만큼 돈 벌 직장도 못 구할 거라’ 모진 소리를 하는 마리온을 보니, 우리 집 미모의 50대 여성을 절로 떠올리게 된다. 이 뉴스레터를 쓸 때마다 그 여성분께 ‘돈도 안 되는 일 한다’는 소리를 한 번씩 듣는다. ‘내 생각을 담은 에세이를 한 달에 한 번 써서 익명의 독자들에게 이메일로 보내고, 이건 일종의 사이드 프로젝트라 돈을 위해 하는 일은 아니다’라는 설명을 매번 변명처럼 늘어놓지만, 엄마는 매번 탐탁지 않은 눈길로 나를 바라본다. 그러니 나는 이력서와 서울 집값에 대한 일장 연설이 날아오기 전에 ‘아, 그런 게 있어~’라며 방문을 닫거나 노트북을 닫는 수밖에···. 

엄마와 다시 함께 살면서, 나는 엄마와 정말 다른 사람이 됐다는 걸 실감한다. 나는 엄마 품을 떠나 친구들과 룸메이트가 되거나 혼자 살면서 나름대로 체득한 생활 방식이 있다. 예를 들어, 자고 나면 반드시 이부자리를 갠다든지, 방문을 열 때는 노크를 한다든지. 그러니 성격 급한 엄마가 내 방에 벌컥 들어와 할 말을 늘어놓으면 나는 짜증이 솟구친다. 반대로 엄마는 내가 드립으로 커피를 내린 뒤 바로 설거지해놓길 원하는데, 나는 자주 그걸 까먹고 방치하다가 엄마에게 걸린다. 나는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게 좋은데, 엄마는 초저녁에 잠들어 새벽부터 움직이는 사람이라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니, 독립하고 싶어 죽겠다! 네이버 부동산에도 진짜 사무실이 있었다면 내 발걸음으로 문턱이 닳았을 것이다.

사실 사소한 차이는 그럭저럭 넘긴다. 그렇지만 너무 다른 생각과 가치관을 따른다 느낄 때 가장 예민해진다.
- “엄마, 옷 가게 직원 앞에서 내 얼굴, 몸 평가 좀 하지 마.” - “왜?”
- “엄마, 친가 식구들 욕하면서 왜 맨날 잘해주는 거야?” - “사람이 정이 있어야지.”
- “엄마, 나 시집 안 간다니까.” - “그래도 엄마는 너 낳은 게 태어나서 제일 잘한 일인데, 너도 느껴 봐.”
우리 엄마만 그런가? 나는 엄마가 엄마만 생각하며 살아도 아무 불만이 없을 만큼 엄마를 사랑하는데, 그건 영원히 수신 불가능한 마음이다. 내가 원치 않는 ‘자식새끼 걱정’만 되돌아올 뿐이다.

<레이디 버드>의 각본을 쓴 감독 ‘그레타 거윅’에게도 분명 이런 엄마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탈의실 장면처럼 명장면을 만들었겠지. 레이디 버드와 마리온이 주고받는 대화와 눈빛은, 정말 겪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엄마와 딸의 관계가 농축돼 있다.

레이디 버드: 그냥 예쁘다고 해주면 안 돼? 

엄마: 내 말에 신경도 안 쓰잖아. 

레이디 버드: 예쁘게 봐주면 좋잖아.

엄마: 미안해. 사실대로 말한 건데. 거짓말할 걸 그랬나?

레이디 버드: 아니, 난 그냥 엄마가 날 좋아해 주면 좋겠어. 

엄마: 널 사랑하는 거 알잖아.

레이디 버드: 근데 좋아하냐고.

엄마: 난 네가 언제나 가능한 최고의 모습이길 바라. 

레이디 버드: 이게 내 최고의 모습이면?

엄마가 말하는 사랑이 마음에 와닿지 않을 때,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 너무나 이기적이라 느껴질 때, 반대로 내가 엄마를 사랑한다는 마음은 이기적이다 못해 개차반처럼 느껴질 때, 이 장면이 어떤 해답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부모자식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건 다를 수 있다는 게 말이다. 

글머리에 인용했던 대화는 다음으로 이어진다.

김서른: 엄마, 왜 그렇게 나를 낮춰 보는 거야. 엄마는 진짜 내가 아무것도 못 하면 좋겠어?

엄마: 걱정돼서 그러지. 

김서른: 엄마는 나한테 말할 거리가 걱정하는 것밖에 없어? 

엄마: 아니지. 사랑한다도 있고~

사랑한다는 말에 둘 다 푸하학 웃으며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지만, 이날의 대화로 나는 최악의 상황을 걱정하는 게 엄마가 나를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됐다. 마리온이 아직 미성년자인 레이디 버드에게 현실적인 이야기만 골라 하는 것과 꼭 닮은 모습이다. 엄마들은 딸을 그냥 좋아만 해주면 안 될까. 일어나지도 않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서로 얼굴 붉히는 대신, 내가 뭘 입든 좋다고, 내가 비혼으로 살아도 괜찮다고, 내가 나만의 삶을 구상하고 꾸려가는 모든 방식이 좋아 보인다고, 그렇게 좀 좋아해 주면 안 될까.

엄마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사랑한다’라는 말보다 ‘행복하다’라는 말이라던 어느 소설가의 문장*을 함께 생각한다. 그레타 거윅 감독이 이 장면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과 비슷한 마음인 듯하다.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크면, 그 사람을 모두 채우고도 넘쳐버려 때로는 당신을 불행하게도 하니까. 바람 한 점 드나들 만큼만 나를 좋아해주면 엄마가 내내 행복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그게 되나 적당히 좋아하는 게~🎶” 몬스타엑스의 노래가 절로 나온다.

* 최진영, 『끝나지 않는 노래』, 한겨레출판, 2011.

동부의 대학에 몰래 입학원서를 넣은 것 때문에 마리온과 레이디 버드는 떠나는 순간까지 화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리온이 미처 전하지 못한 편지 더미들을 아빠가 대신 전달하면서 레이디 버드는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된다. 잔소리하고 반항하는 대신, 서로의 취향과 생각을 인정하는 말이 오고 간다. 너무 다른 것 같았던 두 모녀가 사실 똑같이 서로를 지극히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아마 괜찮아질 것이다. 우리 엄마도 내가 집을 나가 제 밥벌이할 때까지 사랑한다는 말 대신 걱정된다는 말을 끝없이 할 것이다. 나는 그 생밤처럼 뾰족한 말속에서 걱정의 껍데기는 벗겨내고, 사랑하는 마음만 자꾸 물어야지. 내가 좋아하는 말을 들려 달라고 졸라야지. 그러니까 엄마, 내가 알아서 할게~ 제발~

주민님, 오늘은 엄마와 어떤 대화를 나누셨나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기억에 남는 엄마와의 대화가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