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무스탕: 랄리의 여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영화 시청 후 일독을 권합니다.

“결혼은 언제 할 거니?”

큰이모가 운영하는 반찬 가게에 앉아 있다가 손님에게 결혼은 언제 하냐는 질문을 받았다. 서른 살이라고 하니 대번 따라오는 질문이다. ‘아줌마, 저 아세요?;;;’라는 말은 속으로만 삼킨다. 그저 미소만 지으며 답이 없으니 옆에 있던 엄마가 변명하듯 말을 덧붙인다. ‘아직 연애도 안 해 본 모.솔인데 뭘.’ 아, 이 시공간에서 사라지고 싶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남의 혼인 여부에 관심이 많을까. 그 상황이 너무 무례하다고 느껴져 나는 대꾸도 하고 싶지 않은데, 아마 사람들은 대답이 없는 내가 무례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서른 살, 충분히 어른이 된 내게도 ‘결혼’은 부담스러운 주제다. 이미 결혼보다는 비혼에 중점을 두고 있는데, 언젠가는 손주 자랑할 날이 올 거라 굳게 믿는 엄마의 얼굴을 보면 할 말을 잃어버린다. 결혼을 굳이 해야 하냐고 물으면 ‘일정 나이가 되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게 좋다(왜냐하면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야 하고 그래야 경제도 발전하고…)’는 주장이 돌아온다. 뭐랄까… 서로의 주장은 평행선만 그린 채, ‘결국 네놈이 결혼하는지 안 하는지 보자!’라고 외치며 버티기 싸움을 하는 기분이다.

그런 상황에서 이 영화, <무스탕: 랄리의 여름>을 보게 됐다. (추천해주신 익명의 주민님, 감사합니다💕) 2022년 대한민국의 여자 어른은 비혼이라는 이름으로 혼자만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지만, 그러지 못하고 속절없이 결혼식장으로 들어서야 하는 어떤 여자아이들을 만나게 됐다. 결혼을, 마치 형벌처럼 말이다.

<무스탕: 랄리의 여름>의 주인공은 다섯 자매(나이순으로 소냐, 셀마, 에체, 누르, 랄리)다. 터키의 어느 아름다운 시골 마을, 오래전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삼촌 밑에서 자란 10대 소녀들은 그늘진 구석 없이 천진하고 명랑하다. 몸을 부대끼며 장난치거나 바닷가를 걸으며 노는 모습은 자유분방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이들의 아름다운 일상은 산산이 조각나고 만다. 방과 후 해변에서 남자아이들과 목말을 타며 노는 모습을 이웃 아줌마에게 들킨 것이다. 다섯 아이는 ‘남자아이의 목에 아랫도리를 문질렀다’는 죄로 산부인과에 끌려가 순결 검사를 받는다. 여성의 혼전순결이 집안의 명예와 직결되는 보수적인 이슬람 사회에서 자매들의 사소했던 장난은 엄격한 처벌과 교정의 대상이 된다. 그날로 다섯 자매는 학교도 가지 못하고, 집안에 갇혀서 강제로 신부 수업을 받게 된다.

짧은 청바지와 티셔츠 대신 따분한 원피스를 입으며(자매들 왈: “똥색 누더기”), 학교에 가는 대신 요리와 바느질을 배우며 그럭저럭 살아갈 때만 해도 괜찮은 줄 알았다. 집안을 탈출해 축구 경기를 직관하러 가고, 첫째 소냐가 몰래 사귀던 남자친구와 정식으로 결혼할 때까지는 그래도 평온해 보였다. 하지만 할머니와 삼촌은 자매들을 차례로 선 자리에 내보내고, 남자를 사귀어 본 경험도 없던 아이들은 자꾸 벼랑 끝으로 내몰린다. 얼굴도 모르던 남자와 결혼한 둘째 셀마는 불행해 보이고, 본인의 차례가 되자 불안을 견디지 못한 셋째 에체는 결국 자살을 택한다. 에체가 그렇게 죽었는데도 넷째 누르를 결혼시키려 하자, 그전부터 탈출을 은밀하게 준비해 온 막내 랄리는 누르와 함께 이스탄불로 도망친다.

“감옥살이 같은 삶이지만, 자매들의 그해 여름은 눈부시게 빛난다.”는 시놉시스를 달고 있는 이 영화… 이게 어떻게 눈부시게 빛나는 거냐며 따지고 싶을 만큼 서글프고 열받는다. 물론 랄리와 누르는 이스탄불로 도망치는 데 성공해서 자유를 얻지만, 그 이후의 삶이 내내 자유로울 수 있을까. 앞으로도 두 사람은 일상적인 차별과 억압에 맞서가며 살아야 할 것이다. 모르는 사람에게 ‘결혼 안 하니?’ 같은 질문을 받는 일처럼.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미혼이라는 말 대신, 결혼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비혼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비혼 여성 가시화를 위한 팟캐스트 <비혼세>를 운영하고, 비혼 에세이를 펴낸 ‘해방촌 비혼세’라는 작가가 있다. 나는 <비혼세>를 심심할 때마다 BGM처럼 틀어 두는 열혈 청취자인데, 비혼세 님이 ‘배우자 없이 태어난 이후 살던 대로 살고 있다’는 말로 자기소개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말을 처음 듣던 날, 앞으로 모든 결혼 압박에 대해 이렇게 받아 쳐야겠다고 마음먹었을 정도다.

그렇다. 오히려 배우자를 만들고 결혼제도로 묶을 결심을 하는 건 ‘살던 대로 사는 게 아니라’ 변화를 주는 커다란 선택이다. 선택이라는 행위에는 무거운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 그런데 사회는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결혼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때가 되면 연애할 거고, 때가 되면 결혼할 거라 아이들을 가르친다. 연애도 결혼도 모두 '선택'의 영역이라는 사실은 쉽게 간과한다. 파트너와 짝지어 태어나는 인간은 없으니 비혼은 인간의 디폴트 값인데, 특정 나이가 되면 비혼은 유별나고 결혼은 당연한 것으로 뒤바뀌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하다.

나는 열다섯 살 때부터 결혼하지 않겠노라 마음먹은 야무진(?) 중학생이었다. 결심한 그 순간부터 내 나름의 이유를 찾고 고민하며 비혼을 택했다. 10년이 넘는 시간을 두고 충분히 내린 결정인 셈이다. 살면서 이렇게 고심하여 선택한 경우가 드문데도, 나의 결심은 자주 무시당하고 언제든 깨져도 좋을 것처럼 취급당한다. 부모는 자꾸 내가 연애 경험이 없어서 그런 거라고, 연애하면 결혼하고 싶어질 거라고 말한다. 친구들은 ‘이런 애들이 가장 먼저 결혼한다~’고 놀렸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결혼한 친구들이 꽤 생겼으니 과거형으로 쓴다) 사람들은 비혼의 상태 뒤에 더 나은 결혼이 올 것처럼 이야기한다. 사실 그런 사람들 앞에서 나의 결심은 쉽게 흔들린다. 자주 외롭고 불안하기 때문이다.

열다섯 살의 내가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이유는 사실, 주위 어른들의 결혼이 행복해 보이지 않아서였다. 기쁜 일, 슬픈 일도 함께 헤쳐 나가는 게 부부고 가족이라지만 이를 위해 감당해야 하는 책임이 훨씬 커 보였다(물론 거기에는 내가 미처 읽어내지 못한 성취감과 행복이 있겠지만 말이다). 두 사람이 행복해지려고 결혼한 건데 둘 이상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책임져야 한다는 게 나는 이해되지 않았다. 스무 살이 넘어서는 4인 1실 기숙사에서도 살아보고 혼자 자취도 해보며 비혼 결심을 더욱 굳혔다. 나는 4평짜리 방에 살더라도 혼자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사는 게 가장 적성에 맞는 인간이구나!

그렇지만 이런 결심은 정말 외로운 순간이 닥쳐오면 크게 흔들리는 것 같다. 일요일 오후 혼자 자취방 침대에 누워 있노라면, 친한 친구들에게 청첩장을 받을 때면, SNS에 아이를 낳고 키우는 친구들의 소식이 올라올 때면 나만 이 자리에 고여 있는 느낌을 받는다. 나만 혼자 아무런 변화 없이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는 거면 어떡하지. 서른 살에도 마흔 살에도 나는 이 상태 그대로면 어떡하지.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야, ‘진짜’ 인생의 의미를 알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오만가지 생각들로 자주 불안해진다. 그러니 결혼은 언제 하냐는 무례한 질문에 “저 결혼할 생각 없는데요?”라고 선뜻 받아치지 못하는 걸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꾸 나의 결심으로부터 도망갈 구석을 만들어 놓는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랄리처럼 원하는 것을 손에 넣기 위해 앞만 보고 돌진하는 성격이 못돼서, 대신 결혼이 아닌 방식대로 살아가는 타인의 존재를 자주 들여다봤다. 그러면서 비혼이라고 해서 혼자 외딴섬처럼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앞서 언급한 팟캐스트 <비혼세>는 비혼 여성들의 다양한 라이프스타일을 아주 유쾌하게 전달하는 방송이다. 엄마아빠와 함께 사는 캥거루족도, 1인 가구도, 이혼 경험이 있는 비혼도 있고, 이들 이야기를 즐겁게 청취하는 기혼자, 결혼했지만 제도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동성 결혼 부부도 있다.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처럼, 두 40대 비혼 여성이 동거하면서 함께 사는 경우도 포함될 수 있겠다. 이 책에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는 tvN 예능 <조립식 가족>에서는 친구들이 모여 꾸린 가족도, 결혼 없이 동거를 택한 커플도 보여준다. 결혼만이 선택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소중한 사례들이 점점 더 많이 모이고 있다. 더 많은 이야기가 모이면 모일수록 더 큰 용기가 되지 않을까. 모이고 모여서, 저 멀리 터키의 랄리 자매들에게까지도 전달될 수 있다면 좋겠다.

나도 좀 더 유연하게, 하지만 구체적으로 비혼의 삶을 설계해보려 한다. 나는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난다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김하나, 황선우 두 작가님처럼 살아보고 싶다. 나는 청소와 설거지, 빨래는 즐겁게 잘 할 수 있으니 요리를 좋아하는 룸메이트를 만나면 좋을 것 같다. 성애적으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도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기반으로 파트너가 되는 것, 그건 결혼보다 어쩌면 더 큰 용기가 필요한 일 같아서 꼭 도전해보고 싶다. 운전을 할 줄 모르니 도망치지 못한다는 셀마 언니의 말을 듣고 운전을 배우기 시작한 랄리처럼, 언젠가 도망치기 위해 돈을 모으고 미리 탈출 가방을 싸두어 마침내 이스탄불로 떠난 랄리처럼,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면 두려울 일도 없을 거라 믿는다.

신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결혼이 성사되는 상황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않았기에 오늘 <아직도 하이틴>을 쓰는 건 조금 어려웠다. 하지만 멀리 두고 생각하면 영화 속 터키의 시골 마을과 지금 여기의 내가 크게 다르지 않은 것도 같다. 어쨌든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자매가 처한 현실에 함께 분노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싸우는 랄리의 용기를 이야기하고 싶다. 오늘의 감상이 주민님께도 잘 전달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