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아니오’ 입니다. 이건 영화 시작부터 엘리 추가 알려주는 거니, 스포일러라 하기도 애매하네요. 편지를 주고받으면 받을수록, 엘리 추–폴–애스터의 관계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자라납니다. 말은 잘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몰랐던 엘리 추, 마음은 알지만 그걸 말로 꺼낼 줄 몰랐던 폴, 그리고 자신의 진짜 말과 마음을 들어줄 사람이 없었던 애스터. 세 사람은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며 불안한 삼각형을 그리게 됩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이라면, 꼭 영화로 결말을 확인하시길 바라요. 찬찬히 뜯어보면 참 좋은 구석이 많은 이야기니까요. 

엘리와 애스터의 편지에 대해 좀 더 얘기해볼까요. 글의 첫머리에 썼던 것처럼, 제게도 편지를 둘러싼 추억이 많아요. 라이브칼라 사인펜과 하이테크를 색색깔로 모으던 그 시절, 그거 모아서 뭐 했겠어요. 휘황찬란 편지지 꾸미는 데 다 썼죠, 뭐. (지금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친구들에게, 내내 열일곱의 얼굴로만 남아 있는 친구들에게… 여전히 내 편지 갖고 있다면 다 태워주길 바란다.)

<반쪽의 이야기>는 엘리와 애스터의 내레이션과 교차 편집을 통해 두 사람이 어떻게 편지로 교감하는지 보여줘요. 두 사람은 책과 그림에 대해 상당한 교양이 있고, 자신의 취향이 무엇인지 표현할 줄도 아는 친구들이죠. 

얘들아, 진짜 무슨 말인지 아는 거니. (이런 대화를 편지로 주고받는 게 아무렇지도 않다면 정말 천생연분 아닌가요) 인생에 대해 통달한 이 조숙한 아가씨들은 사실 미술 이야기를 하며 자신의 인생에 대해  넌지시 푸념하는 중입니다. 지금 이곳에서 ‘괜찮게’ 살아가는 법은 알지만, ‘훌륭한’ 무언가를 위해 대담한 선을 그려 넣을 만큼 용기를 갖는 것, 그게 참 어렵거든요. 엘리 추는 그런 애스터를 위해 어느 벽에다가 아무렇게나 선 5개를 그어 놓고, 위도와 경도를 쓴 편지를 보내 그를 초대합니다. 엘리 추가 깔아 준 캔버스에 애스터가 획을 긋고, 거기에 엘리가 메시지를 남기고, 애스터가 색을 칠하며, 두 사람은 마침내 훌륭한 한 폭의 그림을 완성합니다. 이렇게나 특별한 순간을 공유했는데, 어떻게 사랑에 빠지지 않고 배기나요.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호감을 무럭무럭 키워나갑니다. (애스터는 폴에게, 엘리는 애스터에게 빠졌다고 표현하는 게 정확하겠지만요.)

두 사람의 그림은 결국 사라지지만… “어쩌면 중요한 건 그거야. 그림을 망가뜨리더라도 그 괜찮은 그림을 다시 그릴 수 있다는 걸 알아야만 해.” 명언 제조기 폴, 아니 엘리 추. 출처: Netflix Philippines

말로 꺼내기엔 쑥스러운 이야기도 편지에는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일까요. 편지라는 것이 이토록 힘이 세답니다, 여러분. 생각과 감정은 매 순간 끓어오르는데 들어줄 사람은 없는 외로운 두 여자 고등학생이 만난다면 그 에너지가 더 세진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하나가, 관계를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자신에게 동성을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면 이야기는 좀 더 복잡해진답니다. 애스터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폴에게 일장연설을 늘어놓다가 자신이 애스터를 사랑한다는 걸 알아차린 엘리 추의 표정은 얼마나 혼란스럽고, 또 아름다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