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즌에서 내게 특히 감명을 줬던 건 ‘수치심 간판’ 에피소드(6화)였다. ‘수치심 간판’은 호프 교장이 고안한 처벌인데, 전교생이 모인 강당 앞에서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는 문장을 간판에 써서 목에 거는 것이다. 그 잘못이란 사실 호프 교장이 정해놓은 온갖 규칙을 어겨 그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점이고, 그런 면에서 굉장히 자의적이고 잔인하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대놓고 모욕한다는 점에서 더더욱.

한번 상상해보자.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가장 부끄럽고 내밀한 기억을 떠올려볼까. 의도치 않게 실수한 기억부터, 아주 오랫동안 품어온 비밀까지, 생각만 해도 이불킥이 절로 날아갈 만큼 수치스러울수록 좋다. 준비가 됐다면 두꺼운 종이에 써서 목에 걸어보자. 수치심 간판을 목에 걸고 친구들 앞에 설 수 있을까? 얼마나 그 앞에 허리를 펴고 서 있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나는 연애 경험이 없다는 얘기를 간판에 써야 할 것 같다. ‘모쏠’ 스물아홉, 마법사가 되지는 못했고 다만 대화에 연애의 “연” 자만 나와도 조용히 입 다물고 그 주제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다. 또래 친구들이 술안주로 깔만한 전남친/전여친 에피소드를 몇 개씩 쌓거나, 누군가는 결혼해서 남편썰이나 시월드썰을 풀 동안 나는 침묵을 택한다. 친구들도 내 사정을 알기에 듣고만 있는 나에게 굳이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수치심 간판을 목에 거는 기분이 든다.

연애와 섹스는 게임의 퀘스트가 아니라고, 누구나 그렇듯 퀘스트를 깨고 경험치를 획득하여 레벨업 해야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 말을 나 자신에게 진심으로 해주는 건 정말 어렵다. 모두가 할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 사이 과제를 손도 못 대고 방과후 교실에 남아있는 기분, 그 기분 때문에 가끔 나는 조급함을 느끼고 무한히 작아지는 것만 같다고… 아무리 친한 친구들이라도 이 기분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 않을 만큼 나는 부끄럽다. 그러니 내 간판에는 “나는 스물아홉이 될 때까지도 연애 경험이 없고, 그저 오티스나 보며 아는 척할 거리를 만듭니다.”라고 적으면 될 것이다. (아아…)

차라리 다 아는 척을 할까, 없어도 있는 척을 할까 싶은 마음이 들 때면 아마 진의 목소리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 시즌3 마지막 화, 결국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 오티스는 진에게 메이브를 정식으로 소개한다. 두 사람이 마침내 마음을 확인할 때까지의 여정이 너무너무 길고 험난했던지라 오티스는 ‘사랑에 관해선 아무것도 모르지만’이라는 단서를 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