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님 잘 지냈어? 오랜만에 인사하는 것 같아 참으로 반갑90000. 내비게이터들은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며 숨은 띵작들도 모아보며 다음 안내서를 준비하고 있어! 더 알차고 멋진 안내서로 3월에 돌아올 것이니 기대해줘. 그 와중에 김서른씨는 부지런히 <아직도 하이틴> 5호를 준비해 왔어. 이번 호는 요즘 시즌 2가 미국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는 🔥한 시리즈, <유포리아>야. 개인적으로 너무 좋아해서 다음 안내서로도 준비하고 있어. 미리 김서른씨의 감상을 읽으며 마음의 준비를 해놓길 바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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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연진
감독 및 각본
평균 러닝타임
55분 / 총 1시즌, 10 에피소드(스페셜 포함)
볼 수 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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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유포리아> 시즌 1과 스페셜 에피소드 두 편을 모두 시청한 뒤 일독을 권합니다. 안 보신 분들은 꼭 시즌 1을 다 본 뒤에 스페셜 에피소드를 보셔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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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포리아> 시즌 1을 봤다. 미국 현지에서는 시즌 2가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중. 지난 일요일엔 무려 ‘슈퍼볼’과 방영 시간이 겹쳤는데도 그 전주보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사실 <유포리아>는 <아직도 하이틴>의 시작부터 내비게이터 찐하가 강력하게 추천한 작품이었지만 나는 시놉시스부터 내키지 않았다. ‘약물과 성, 트라우마, 범죄 그리고 소셜 미디어가 가득한 세상 속에서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10대 청소년들의 이야기’... 하이틴을 사랑하는 김서른으로써, 10대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그저 “재밌으면 됐지?” 묻는 작품은 싫은데. 경계하는 마음으로 재생을 시작했다.
그렇지만 나는 여자아이 둘이서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는 이야기에 몹시 취약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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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포리아: 막 나갈게
줄스와 루: 사랑할게
김서른: 글 쓸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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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포리아>는 ‘이스트 하이랜드’라는 미국의 마을을 배경으로, 2001년 9월 11일에 태어난 주인공 ‘루’와 막 이곳으로 이사 온 ‘줄스’가 친구가 되면서 둘의 관계와 주변 친구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드라마다. 21세기와 함께 태어난 이 ‘Z세대’들은 마약, 섹스, 소셜 미디어 등 온갖 자극을 온몸으로 흡수하며 자란다. ‘자란다’는 표현을 쓰는 것도 좀 고루한 것 같다. 이 폭풍이 지나면 한 뼘 더 성장할 거라는 기대를 걸기도 전에, 아이들은 이미 훌쩍 커버리고는 망가질 일만 남았다는 듯 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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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나는 <유포리아>가 10대 아이들의 일탈을 그저 흥밋거리로 치부하는 쇼이기보다는, 10대 여자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과 조건을 깊이 성찰하는 이야기라 생각하게 됐다. (물론 여전히 이야기는 진행 중이기 때문에 나의 판단은 틀릴 수도 있다.)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아이들은 자기만의 문제가 있고, 그게 마법처럼 단숨에 좋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성장’하기 위해 어떤 문제를 풀어 내야 하는지 그들은 모르지만, 이 세계를 창조한 사람들은 또렷하게 알고 있는 듯하다. 그걸 스페셜 에피소드를 보며 확신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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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에피소드는 시즌 1의 마지막, 루와 줄스가 함께 도망치기로 했다가 줄스만 떠나고 루는 기차역에 남겨진 이별, 그 이후의 이야기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본편과는 달리, 시즌 1에 일어난 사건을 복기하며 나누는 대화가 에피소드의 전부다.
등장인물이 엉덩이 한 번 떼지 않는데도 재생을 멈출 수 없었다. 그들이 내 앞에 앉아서 진짜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세상만사 통달한 것처럼 내내 염세적으로 굴던 루가 정작 삶의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회피한다는 걸 알아차리거나, 루의 관점으로 진행되는 서사 구조 때문에 그동안 알지 못했던 줄스의 속내를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게 그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게 됐다! 그저 마약이나 섹스에 빠진 10대 미국 고등학생들과 나의 세계는 전혀 다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이다.
특히 줄스의 에피소드를 보면서, 나는 그 아이의 진심이 벅차서 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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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줄스가 루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성애적으로는 별로 끌리지 않고, 루가 줄스를 좀 더 좋아하는 거라 생각했다. 심지어 줄스는 다른 사람과 바람을 피우고, 그걸 루에게 고백까지 하니 말이다. 그러나 줄스의 진심은 생각보다 더 무겁고 애틋하다. 루가 충동적으로 키스하고 도망쳤을 때(ep.3), 사실 줄스는 “여자애와 그렇게 가까이 있어 본 적도 처음”이라 얼어버렸다고 고백한다. 루는 그것도 모르고, 관계를 망쳤다는 마음에 그 길로 약 빨러 갔는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한번쯤 쳐다볼 만큼 아름답고, 눈에 띄게 치장하고, 틴더로 만난 낯선 남자들과 아무렇지 않게 잠자리를 하는 아이에게 절친과의 입맞춤은 단순한 에피소드일줄 알았다. 그런데 줄스의 입장에서 보니, 그의 삶에 루처럼 다가오는 사람은 드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줄스가 ‘여성성'에 대해 이야기하던 부분을 떠올려 볼까. 줄스는 여자아이들이 단지 시선만으로 자신을 판단하고, 서열을 매기고, 구분 짓는 것에 익숙하다.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지만 아마 그 시선에 상처 입은 날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MTF 트랜스 여성으로 살아보지 않아서 줄스의 그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는 생각에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럼 줄스가 루를 그토록 아끼면서 깊이 관계 맺는 걸 두려워 한 이유는 뭘까. 그는 루가 마약 중독자라는 사실을 버거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루는 ‘펜타닐’보다 줄스가 좋아서 약을 끊지만, 줄스와 조금만 멀어지면 다시 약에 손을 댄다. 그래서인지 루의 주변 사람들이 ‘네 덕분에 루가 좋아 보인다’고 말할 때마다, 줄스는 부담스러워한다. 10대가 감당하기에 충분히 버거운 문제기도 하지만, 줄스의 엄마가 사실 알코올 중독자였다는 게 드러나니 줄스의 의뭉스러웠던 행동이 모두 이해가 된다. 루에게 왜 엄마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지도.
줄스가 루에게 자신의 비밀을 모두 털어놓는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떻게 변할까? 자신을 정신병원에 가둔 엄마, 알코올로 재활시설에 들어갈 만큼 망가진 엄마,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다시 술에 손을 대는 엄마. 그 엄마를 미워하고, 상처 받았고, 화가 나고, 그러나 엄마가 그렇게 된 것에 죄책감을 느낀다는 걸. 엄마의 모습을 루, 네게서 본다는 걸. 줄스 혼자서 품고 있기에는 버겁고 루가 감당하기엔 역부족이라, 두 사람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나갈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나 역시 10대 시절을 알코올 중독자의 가족으로 보냈고, 사랑하는 사람이 약속과 거짓말을 반복하던 경험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가 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감독 샘 레빈슨은 SNS에서 ‘줄스가 빌런인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지는 걸 보고 줄스를 위한 에피소드를 기획했다고 한다. 덕분에 한국의 어느 시청자가 ‘강경 줄스 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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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에피소드까지 다 보고 난 후, 루가 고민했던 것처럼 이 두 사람의 사랑이 지속할 수 있을지 점쳐보게 됐다. 알리의 말처럼, 지금은 서로와의 관계보다 자신을 돌보는 게 우선일까? 이들의 사랑은 서로를 구원할 수 있을까?
<유포리아>가 흥미로운 건, 서로의 존재와 사랑이 연인을 성장시킨다는 흔한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는 점이다. 드라마는 루와 줄스가 서로를 아끼고 좋아하는 건 맞지만, 그 사랑이 서로를 구원할 만큼 성숙하지 않다는 걸 분명히 짚는다. 그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왜 루를 잃어버릴 것 같았냐'라는 상담사의 질문에 대한 줄스의 대답이다.
줄스: How could it be possible that Rue loved me as much as I loved her?
어떻게 제가 루를 사랑한 만큼 루가 절 사랑할 수 있겠어요?
상담사: I think the better question is, why do you think that would be impossible?
이렇게 묻는 게 낫겠네요. 왜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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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이 더 크다는 걸 이렇게 확신에 차서 이야기하다니. 누군가의 마음을 자신의 기준으로 측정하고 재단하는 것 자체가, 지극히 이기적이고 어린 마음이라는 걸 줄스가 언젠가 이해했으면 좋겠다. 지금 발밑에 채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벅찬 줄스는, 당연히 상담사의 역질문에 답하지 못한다. 누군가의 사랑을 저울에 달지 않고 그가 건네는 그대로 받아들일 여유가 있을 때, 비로소 ‘어른스럽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나도 꼭 룰스처럼, 시소의 아래 자리에 앉아 이건 불균형하다는 생각에 깊이 상심한 적이 있었다. 나의 상대도 친한 친구였고, 그때 나는 그 마음을 사랑이라 정의할 용기는 없으면서 그 사람이 내게 주는 애정이 부족한 것 같아 억울했다. 그래 놓고 딱 한 번 내 마음을 진지하게 고백할 타이밍에, 나는 마음을 참는 게 어른스러운 거라 생각해 침묵을 택했다. 돌이켜보면 정말 이기적이고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더 자세하게 적으면 사연 팔아 글 쓰는 사람이 될 것 같아 여기서 줄인다.) 그때는 내가 더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그런 나를 받아준 상대방이 내게 최선의 마음을 줬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철없이 굴던 내가 그래도 잘한 건, 동굴을 파고 들어가는 대신 상담사를 찾아간 일이다. 몇 개월에 걸쳐 대화를 나누며, 나는 나의 못난 부분을 받아들이게 됐다. 심지어 상담을 시작할 땐, 내 문제가 뭔지도 제대로 정의하지 못했다. 선생님, 왜 가만히 있는데도 눈물이 날까요?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무기력한 걸까요? 김서른 씨, 정답은 당신이 당신의 마음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실제 선생님은 일언반구 없이 내 말을 열심히 들어주셨다. 나 혼자 열심히 떠들면서, 나는 내가 그 관계에 집착했다는걸, 인간이기에 그럴 수 있다는걸, 이 모든 걸 인정하지 못했기에 불행해졌다는걸 인정하게 됐다. 그제야 조금이나마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 루와 줄스에게도 그런 순간이 오길 바란다. 두 사람에게 상처를 준 어른들도 있지만, 두 사람을 품어주는 어른도 있으니 아마 가능할 것이다. 신기루 뒤의 유토피아로 도피하는 게 아니라, 지옥과도 같은 현실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나는 루와 줄스가 마약이 주는 찰나의 쾌락과 안정감이 아니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의 환상에서 얻는 사랑이 아니라, 지금 그들이 발 딛고 있는 곳을 인정하고 문제를 직시하길 바란다. 유토피아를 찾아 떠난 ‘퓨리오사’가 결국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 구원을 손에 넣었던 것처럼(영화 <매드맥스>), 모든 문제의 해결과 성장의 단서는 나로부터 시작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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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와 줄스, 그리고 <유포리아>의 이야기는 현재 진행 중이다. 별 기대 없이 심드렁하게 시작해 놓고, 유포리아 공식 SNS 계정을 팔로우하고 실시간으로 시즌 2 진행 상황을 살피는 사람이 됐다. (엄청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시즌 3 제작도 확정됐다고 하니, <유포리아>를 아직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꼭 챙겨 보기를 권한다. (꼭 마음이 편안하고 안정적인 상태에서 보기를!) 하이틴 드라마라고 하기엔 좀 거칠고, 시행착오를 지켜보는 건 괴롭지만, 쉬이 예측할 수 없는 캐릭터들의 모습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기쁨이 있다. 피부색도 쓰는 언어도 나이도 모두 다른데, 공감할 지점이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누군가가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불안함, 조바심, 그리고 안도감(?)을 기대하며 다음 시즌을 기다려 본다.
루야, 줄스야. 꼭 뉴욕에 가서 둘이 알콩달콩 하게 살 거라. 혹시 헤어지더라도 그것 때문에 자신을 모두 무너뜨리지는 말거라. 엄마 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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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철없는 생각과 이제 10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꼰대 같은 생각을 동시에 합니다. 그래도 그 나이 때만이 겪는 찬란한 성장 앞에 맥을 못 추고 마음을 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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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하이틴>은 매회 영화나 드라마 속 하이틴 캐릭터 하나를 택하고,
그가 겪는 성장의 지점을 살펴보는 에세이 코너입니다.
대단히 정교한 분석이나 비평보다는
'그땐 그랬지, 나 아직도 그러네...' 식의 감상이 될 것 같습니다!
평범하고 느릿한 제 삶보다는, 2시간 안에 훌쩍 커버리는 가상 캐릭터의 성장이 아무래도 더 잘 보이니까요. 그들의 성장에 기대어 제가 어떤 시간을 지나온 건지, 저도 곱씹어보려 합니다.
마침내 서른 살이 되거나, 스물아홉 해의 솔로 생활을 청산하는(!) 그 순간까지 연재합니다.
from. 김서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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옽뜨스텔라 ottstellar@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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